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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일어나서야 안되는 축구 사건 , 헤이젤 참사

FootBall/사건사고 Story

by 푸키푸키 2019. 10. 1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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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일어나서야 안되는 축구 사건 , 헤이젤 참사


리버풀의 흑역사라고도 불리며 두 번 다시 일어나면 안되는 사건 헤이젤 참사


때는 1985년 5월 29일 리버풀의 서포터들과 유벤투스의 서포터들이 싸움을 하며 생긴 사건을 헤이젤 참사라고 부르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언급되며 많은 축구 팬들이 추모를 하는 가운데 축구 팬이라면 한 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헤이젤 참사


▼사건의 시작▼


1985년 5얼 29일 리버풀과 유벤투스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은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헤이젤 경기장인 스타드 루아 보두앵에서 펼쳐지게 된다.


당시 보두앵 경기장은 상당히 낡은 구장으로 안정성에 문제가 많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 당시 경기장에는 양 구단의 서포터의 구역을 구분할 벽도 없었으며 서포터들의 자리 배치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경기장을 상공에서 바라보는 기준으로 왼쪽에는 리버풀 , 오른쪽에는 유벤투스의 서포터들 자리가 정해져 있었지만 리버풀 존 한 켠에 있는 중립 존에서 해당 사건이 발생되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1시간 전 고작 울타리 하나로 구분되어있던 관람석의 자리는 유벤투스 , 리버풀 팬들의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흥분한 리버풀의 팬들이 울타리를 넘어 유벤투스의 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망자 발생▼


점점 사람들은 싸움 장소에 몰려 같이 싸우기 시작하지만 중립 존에서 콘크리트 벽이 무너지며 이탈리아인 32명 , 벨기에인 4명 , 프랑스인 2명 , 북아일랜드인 1명 총 39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이어 600여명의 부상자가 생겼으며 총 29명의 팬들이 구속되고 말았다 , 무엇보다 해당 싸움을 방관했던 경찰 한 명과 벨기에 축구협회 관계자는 집행 유예가 내려졌으며 축구 팬들의 과도한 구단 사랑이 이러한 참사를 만들고 말았다.


헤이젤 참사


▼경기▼


하지만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유벤투스와 리버풀의 경기는 계속해서 진행되었고 경기 스코어는 1-0으로 유벤투스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골을 넣은 유벤투스의 선수 미셸 플라티니는 구단의 우승에 상당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런 모습은 팬들에게 비판을 받을 뿐이었다.

▼사건 이후▼


리버풀 팬이 유벤투스 팬들이 있던 구역에 침범해 일어난 이 사건은 리버풀의 잘못을 더욱 크게 보았고 UEFA는 잉글랜드의 훌리건 문화가 이만큼의 문제가 많다는 것을 간주해 잉글랜드 전체 구단에게 5년간 UEFA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는 징계를 내리게 된다.


리버풀은 5년에 1년이 더해져 6년 동안 출전할 수 없게 되었으며 리버풀 서포터즈의 행동이 잉글랜드 축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사건이 발생된 구장이었던 스타드 루아 보두앵은 육상 경기장으로만 사용이 되었고 추모비에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알려졌다.


사건이 발생한 이후 너무나도 과격한 서포터즈 문화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경찰 및 보안에 상당히 엄격한 기준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벤투스의 판타지스타인 델 피에로는 현역 선수 당시 리버풀로 이적할 기회가 찾아오지만 그는 헤이젤 참사로 인해 리버풀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케니 딜글리시▼


당시 리버풀의 선수였던 케니 딜글리시는 "리버풀 팬들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 하지만 자신에게 돌을 던지고 있을 때 반응하지 않고 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라고 말하며 이탈리아 사람들이 돌을 던져 영국 사람들이 맞았다 라는 식에 발언으로 마치 이탈리아 사람들로 인한 사건 처럼 언급하기도 하였다.


케니 딜글리시는 이 사건이 리버풀의 서포터즈가 아닌 유벤투스의 서포터즈들로 인해 시작된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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